나의 200lx에 문제가 생겨서 이번주 월요일 어렵게 새로운 200lx를 한 대 겨우 구했었다. 200lx를 구입하러 가기위해 월요일을 거의 비우다시피할 정도로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했고, 이 기기의 판매처를 찾는 과정에서도 상당히 많은 시간을 소모했던 것 같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고, 일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다소 민감한 시기인 것을 감안할때 나로서는 매우 큰 투자를 한 셈이다. 그만큼 200lx에 대한 애정이 컸던 것이다. 


이번에 구매한 200lx는 B ~ C급 사이에 있는 제법 험하게 사용된 중고품이었는데, 그나마 최선을 다해 노력해서 이 정도 기기라도 구매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쉽게도 구입한지 하루만에 D와 O, N 키의 접촉이 좋지 않아 의식적으로 신경을 써서 꽉 누르지 않으면 입력이 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났다.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지 잘모르겠지만,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쓰다보면 접촉이 살아나서 입력이 될 수도 있지않을까란 일말의 희망을 가졌었는데, 다음날 설상가상으로 액정에 엄지손톱크기만한 멍자국 같은 것이 생겼다. 200lx가 곧 사망할 전조로 여겨졌다. 약간 자극적인?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혹시 액정에 사용된 독성물질이 새어나오는 것은 아닐까하여 휴지로 닦아내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여유가 없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200lx의 구매를 위해 꽤 많은 시간을 투입했던 나로서는 허탈할 수 밖에 없었다. 물건 값 5만원이야 별 것 아닌 푼돈이지만, 물건을 구입하기까지 꼭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고 그 귀중한 많은 시간을 200lx의 구매처를 알아보고 약속잡고 찾아가서 구매하는데 썼다가 결국은 의미없는 sunk cost化 되고야 만 것은 그야말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막대한 손해였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잠시 멘붕이 왔으나 이내 곧 200LX에 대한 아날로그적 감성을 잠시 뒤로하고 객관적 관점에서 이성적으로 차분히 접근해보기 시작했다.


일단 나의 200LX 라이프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기기라고 해도 사용의 영속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200lx에 입력되는 데이터는 내게는 매우 중요한 데이터들이다. 스쳐지나가는 찰나의 아이디어들... 각종 Q&A, 그날그날의 시간을 축으로 변동되는 각종 기록... 이런 류의 데이터는 일종의 로그 기록이다. 나의 200lx의 역할 중 중요한 한 축이 바로 일종의 로그발생기(log recorder)로서의 역할 수행이었는데, 200lx에 입력된 데이터는 200lx 고유형식의 DB파일이기때문에, 200lx가 없으면 그 DB로부터 2차분석을 위한 로그 로데이터 TXT 파일(log raw data, 콤마 등의 분리기호로 추출되는 텍스트파일)을 추출할 수가 없게된다.


추출이 불가능한 로그(log)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로그는 어찌보면 추출하여 향후 다시 살펴보고 분석하는 것을 전재로하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월 한달간의 로그가 담긴 DB 파일은 있는데, 그 DB파일에서 로데이터 텍스트 파일을 뽑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기기인 200lx가 고장났고, 대체가능한 200lx는 재구매가 불가능한 상황이 오면 난감할 수 밖에 없다. 


로그기록 이외의 활용에 대해서 고찰해보면,

재무계산기 기능은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바투 같은 전용계산기를 쓰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200lx의 직관적인 Solver 계산기능을 쓰지 못하는 것은 유감이지만, 이런 것은 어짜피 데이터만 있으면 곰곰히 생각해보며 엑셀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200lx의 심플한 DB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못내 아쉽다. 200lx의 DB만큼 내 구미에 맞는 DB는 맥킨토시의 벤토(bento)류 정도의 DB인데, 이를 위해서는 맥북을 들고다닐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내가 별로 썩 내켜하지 않는 클라우드를 통한 동기화 방식을 사용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아이디어의 기록은 그냥 시스템 다이어리로 대체할 수 있다.

아이패드에는 아직 쓸만한 스프레드쉬트가 없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일단 윈도8 서피스 태블릿을 구매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의사결정을 내려야할 시기가 온다. 영속성이 보장되지 않는 기기에 집착하기보다는 융통성을 발휘해서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더라도 앞으로의 상황에 더 적절한 해법을 찾는 것이 바람직한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폴 오스터는 그의 책 <빵굽는 타자기>를 통해 그의 타자기가 얼마나 그에게 값진 빵을 구워주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지만, 나의 200lx는 내게 빵다운 빵을 제대로 구워주지도 못하고 떠나게 될 운명이다. 나는 이제 빵을 윈도8 태블릿이나 다른 기기를 통해 구워야만 하는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인가?


제 3자의 객관적인 시선에서는 200lx에 집착하는 것이 더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유학생활 중, 모 헬스케어社 vice president와의 인터뷰 주선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뵌 나이가 지긋하신 한 교수님이 인터뷰 성사를 위한 이메일을 PC로 쓰지 않고, 굳이 RIM 블랙베리의 쿼티 키보드를 사용하여 작성하고 보내는 모습을 보고 참 희한하다는 생각을 했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몇년의 시간이 흘러 200lx의 쿼티 자판에 매달리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인생지사 새옹지마라더니... 이제서야 그때 그 블랙베리를 애지중지하던 그 교수님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그래도 블랙베리는 그 당시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던 기종이라서 언제든지 대체기종을 구할 수 있는 이른바 영속성이 보장된 기기였다. 하지만, 내가 소중하게 사용해왔던 200lx는 그렇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예전 기기의 사용을 고집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처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번 일을 계기로 이제 200lx의 사용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보기로 했다. 어짜피 사람의 적응력은 놀라워서 새로운 방식에 또 잘 적응하고 활용하다가 다른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내게 될 것이긴 하다. 결국 시간이 흐름에 따라 200lx는 '한때 참 괜찮게 썼었던 제품이었는데...' 정도의 과거의 한 기억으로 남게 될 운명이긴 하다. 이것이 어찌보면 많은 기업들이 생산해온 수많은 전자제품의 운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200LX에 대한 나의 애정은 지극히 각별하다.

그래서, 일단은 기기의 수명이 다했을 때를 대비해 여유분 200LX를 몇대 더 확보해 보는 쪽으로 노력을 기울여보기로 했다.

Posted by 200LX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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